【 관음기도인께 드리는 세 가지 당부 】
관음기도를 올리고자 하는 불자들에게 꼭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선행이요,
또 다른 하나는 초심의 기도이며
셋째는 집안에 관음상이나 불화를 모시자는 것이다.
선행은 기도성취의 촉매제
기도인의 선행은 어쩌면 당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그 마음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기도인의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 선행일 수 있다.
그러나 탐욕과 이기심을 벗지 못한 일부 기도인 중에는 기도 자체만을 중요시하고
선행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관음기도를 하는 불자가 이러해서는 안된다 관음의 자비를 배우고
대자비의 기운 속에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관음기도인이기에,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행을 베풀어야만 한다.어찌 기도가 절하고 염불하는 것으로만 그치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남의 불만을 없애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 정성껏 사람들을 돕고 보시를 하는 것,
이 모두가 관세음보살께서 깨우쳐 주는 또 다른 기도법인 것이다.
특히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쌓는 선행은 기도성취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이를 증명하는 옛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그중 두어 편을 함께 음미해보도록 하자.
고왕경영좌에는 왕덕성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어린 왕덕성은 노스님을 만나는 꿈을 꾸었고
노스님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일러주었다.
"아깝구나 너의 수명이 18세로 다하니..."
꿈에서 깨어난 왕덕성이 이 불길한 내용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으나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꿈일 뿐 이라면 믿지 않았다.그런데 왕덕성의 나이
18세가되었을 때 노스님은 다시 아버지의 꿈에 나타났다.
"네 아들에게로 곧 염라대왕의 사자가 다가오고 있다.
큰 선행이 없으면 결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급히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꿈에서 깨어난 왕덕성의 아버지는 관세음보살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리면서 원을 세웠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제 아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옵소서,
널리 선행을 베풀어 어려운 사람을 돕겠나이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매일 기도를 올리면서 불경을 간행하여 보시하였고,
가난한 집안에 초상이 나면 관을 보내주었으며,급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이렇게 1년 가까이 선행을 닦았을 때
노스님은 또다시 꿈에 나타났다.
"그대의 선행과 기도 덕에 아들은 요절을 면하였을뿐 아니라 100세를
바라볼 나이까지 살게 되었느니라 노스님으 예언 그대로 왕덕성은 90세가 넘도록 살았다.
초심의 기도
두번째는 초심의 기도이이다.
관세음보살이 어떠한 분이며 관음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안 우리에게는 이제 지극한 마음으로 성심을 다해 기도하고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는 비결이
초심을 잘 간직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초심! 그것은 시작하는이의 마음이다.
지극한 기도는 시작의 그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데 비결이 감추어져 있지만
중생의 기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초심을 잃어버리고 만다.돌이켜보라.
우리가 처음 신심을 일으켜 관세음보살을 염할 때의
그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는가를....
순수한 초심은 이원화을 모른다.
엄마와 아기는 결코 둘이 아니듯이,
관세음보살을 찾는 이와 관세음보살은 별개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실로 기도성취의 원리는 둘이 아닌 불이에 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나위어지고 쪼개어진다.시간이 우리의 마음을 이원화시키는 것인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순수함이 퇴색되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날 수록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가다듬어 관세음보살과 둘이 아닌
기도를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번뇌가 일어나는대로 내버려두면
우리의 마음은 이원화되어 스르르 닫혀지게 된다.
초심의 기도는 결코 닫혀진 마음의 기도가 아니다.
공한 마음의 기도요 준비된 마음의 기도이다.
이 공한 마음의 기도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항상 준비되어 있으며
모든 것에 대하여 열려져 있다.
초심자,열린자,비워진 자의 기도는 원만,성취.진실로 향하지만
물든 마음,닫힌 마음 채워진 마음의 기도는
그 가능성이 적다는 것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초심의 기도는 분별심의 기도가 아니다.
탐욕가 분노와 어리석음에 가리워진 물든 기도가 아니라,
불상샐.불사음,불투도.불망어 가 저절로 지켜지는 근본 마음의 기도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너무 많은 분별을 일으킨다면
오히려 스스로를 힘든 상태로 빠드리고 만다.
또 기도를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욕심을 지나치게 부린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근본 지혜를 잃게 하고 괴롭게 만들어버린다.
곧 지나친 욕심은 우리를 가난과 불만족 속으로 빠뜨려버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 기도인가?
그러므로 처음 기도하는 사람은 지나친 욕심,지나친 겸양에 빠지지 말고 ,
과.부족을 한결같이 넘어서야 한다.
근본 지혜.근본 계율.근본 마음이 원만히 갖추어진 중도 위에 서서
조용히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하나가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부디 간절한 마음의 초심자가 되라.지극한 마음의 초심자가 되라!
마음이 지극할 때 그 기도는 한계가 없다. 그 기도는 관세음보살과 곧바로 통한다.
초심 속에 응결된 그 지극함이 관음과 일치할 때 우리는 항상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우리들 자신에게 진실하며,관음의 대자비 그 자체로 있게 된다.
분명 ,관음기도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항상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항상 시작하는 사람이 되자 우리가 정녕 참된 관음기도인이라면
우리는 스스로 초심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의 기도가 초심의 기도이고자 할때 우리는 초심의 기도를 맛볼 수 있을 거이다.
관음기도인이여!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을 잃지 말자
우리의 기도는 항상 시작이다.
초심 그 속에 기도의 핵심이 있고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감출 수 없는 연유가 있는 것이다.
항상 시작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시작하는 기도인이 되어...
관음상을 모시자
세번재로는 관음상 또는 관음탱화를 집안에 모시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집안에 불상을 모시는 것을 금기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우리와 같은 대승불교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집안에 불상을 모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태국.미얀마 등의
남방불교에서는 불상을 선물로 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집안에 불상 몇 십체를 모시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만 불상을 모시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조선시대 5백년의 억불정택에서 찾아야 한다.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왕조는 불교를 믿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하였고
사대부들이 사찰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따라서 집안에 불상을 모신다는 것은 곧 법을 어기는 일이었고
그들은 사회로부터 매장을 당하였다.사찰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절에
어찌 집안에 불상을 모실 수 있었겠는가 자연 집안에 불상을 모시는 것을
금기시되었고,그와 같은 그릇된 전통이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날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에는
집안에 꼭 불상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와같은 전통은 꼭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이제 옛 설화 한편을 인용하여
가정에 불보살의 불상이나 탱화를 봉안하면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불길해진단는 속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중국 제나라 때 높은 벼슬을 지낸 손경덕은 집안에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항상 공경히 섬겨온 관음신자였다.어느 때 그는 간악학 무리들의 모함으로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3일 후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죽을 날을 기다리며 옥에 갇힌 그는 억울함과 초조함과 원망스러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 원망이 관세음보살님께까지 미쳤다.,
내가 평소에 관세음보살 대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거늘 어찌 이렇듯
큰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관세음보살님도 무심하구나...
이렇게 원망도 하고 은근히 관세음보살께 구원도 바라면서
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노스님 한 분이 나타나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구고관음경을 가르쳐주면서 말하였다.
" 이 경을 천번만 일심으로 외우면 죽음을 면하리라"
빨리 일어나 외우도록 하여라"
경덕은 황급히 일어나 노스님께서 일러주신 구고관음경을 기억해 보았고
3백 글자가 넘는 경문이 저절로 외워졌다.손경덕은 이 경을 지성으로 외웠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오직 이 경만을 외웠다.
마침내 처형을 당하는 날이 다가왔지만 손경덕은 조그마한 공포심도 없이
의연히 웃옷을 벗고 형장으로 향하는 수레 위에 앉았다.그리고 오로지
구고관음경만을 지성으로 외워 형장에 이르기 직전에 겨우 1천만번을 외워 마쳤다.
형장에 이르니 기다리고 있던 망나니가 칼을 번쩍 들어 손경덕의 목을 내리쳤다.
그런데뜻박에도 칼을 세 조각이 나면서 부러졌고 손경덕의 목은 흠 하나 없었다.
망나니가 세번이나 칼을 바꾸어 형을 집행하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사형 집행관이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왕은 즉시 손경덕을 불러 물었다.
"도대체 그대가 어떤 환술을 부린 것인가?"
"환술이 아니라 구고관음경을 1천번 외웠을 뿐입니다 "
마침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 감복한 왕은 손경덕을 사면하였다.
손경덕은 집으로 돌아와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감사의 예배를 올렸다.그
리고 관음상을 살펴보니 목에 칼 맞은 자국이 세 군데나 있었다.
관세음보살이 대자비로서 손경덕의 고통을 대신받고 목숨을 살려 준 것이다.
이 한 편의 실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손경덕의 집에 모셔진 관음상은 손경덕의 원불이었다.
이 원불이 믿는 자의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여 그의 죽음까지도 대신 받았던 것이다.
집안에 불상을 모심이 왜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말인가?
오히려 잦은 기도와 불상을 모심으로 해서 경건해지는 집안 분위기
불상의 예배를 통한 마음의 정화는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한다.
집안에서 사찰처럼 멋진 예불문과 공양을 올리지 못한다고 하여
배고픈 불보살의 노여움으로 벌이라도 내린다는 말인가?
적어도 불보살은 잿밥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루 단 한번의 지극한 합장배례를 칭찬하고 보살펴줄 자비의 대성들이다.
필자는 오히려 권하고 싶다.우리의 집안에다 관음상을 모시자고
우리의 집안에다 원불을 봉안하자고... 그 관음상은 우리 손으로 깍아 만든
목불이라도 좋으리라 어느 불구점에서 구해온 석고불이라도 좋으리라..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라도 좋으리라.
다만 그 관음상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관음의 자비를 배우는
지극한 초심의 기도인이 된다면 족하리라.단 5분의 시간이라도 분향하며
지성의 염원을 심어 보자.그 원이 이 몸에 충만하고 이 집안에 충만하고
이 법계에 충만한다면 이 국토는 관음의 국토가 아닌가
관음의 빛 속으로 중생의 빛이 향할 때 중생의소리를 마음으로 포용하는
관세음보살 지극한 마음의 기도 속에 관세음보살은 이미 와있다.
관음대성은 항상 시작하는 기도인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 김현준 / 불교신행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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